응오딘지엠(고딘 디엠)은 1901년 1월 3일 프랑스의 식민지 베트남 우엔 왕조의 수도에서 명문 가문 출신으로 태어 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독실한 카톨릭(기독교)신자 가문이였고 디엠 역시 이 신앙을 평생 버리지 않는다.
디엠은 신부가 되기 위해 수도원에 들어갔으나 적성에 안 맞는다고 판단, 관료가 되기 위해 법대에 입학한다.
21살의 나이로 법대를 졸업 후 관직의 길을 걷게 된 디엠. 25살엔 지역 사령관으로 승진하는등 출세가도를 달렸다.
1930~31년 반프랑스 농민 반란을 진압하면서 디엠은 반란의 배후가 공산당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는 이후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된다.
1933년 13대 왕 바오다이의 측근이 되어 탄탄한 정치 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왕과의 의견 충돌로 이내 사직, 이후 10년 간 일반 시민으로 산다
1942년 디엠은 일본군과 결탁해 프랑스를 몰아낼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 일본군 장교인 척 하고 도망쳤으며 일본군이 물러나자
1945년 왕실과 결탁하여 반공주의 민족운동을 시작한다.
북베트남 지역엔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민 정부가 수립되었고 호치민은 디엠에게 베트민 정부 관직 자리를 제안했지만 뼛속까지 반공주의자였던 디엠은 당연히 거절했다.
디엠은 바오다이와 뜻이 맞지 않아 미국으로 망명하였고 미국의 지지를 받아 귀국 후 바오다이로부터 모든 권력을 빼앗아 남베트남의 실세가 되었다.
6.25 당시 UN군에 남베트남군을 파병하여 미국의 각종 반공 단체의 극찬을 받게 되었다
또한 대만의 장제스를 방문하는 등 반공외교 활동에 열을 올렸다.
1953년엔 남한의 이승만을 방문, 대한민국으로부터 건국훈장을 받았다.
한편 1954년 디엔비엔푸에서 베트민군에게 프랑스군이 패하자 제네바 조약을 통해 베트남 통일을 위한 선거가 계획되어 디엠은 가족을 이끌고 황급히 귀국한다.
북베트남으로부터 20만 명에 이르는 난민들이 내려왔으며 미국의 지원으로 정치적 기반을 형성하여 많은 피난민들이 남부로 내려오도록 장려했다.1956년 통일 선거에서 이길 수 있도록 특히 가톨릭 신자의 이주를 장려해 북베트남의 천주교 신자 60%가 남베트남으로 이동했다.
그래도 명색의 왕인 바오다이와 의회와의 갈등이 심해지자 디엠은 허수아비 바오다이를 권력으로 완전히 쫓아 내는 정변을 일으키고 선거를 감행한다
미국의 압박으로 북베트남이 굴복하면서 국민 투표의 결과는 보류되었고 남베트남의 국민 투표로 디엠이 국가 최고의 원수가 되면서 남베트남 공화국이 선포, 분단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가 집권하자 서방 세력은 열렬한 반공주의자 디엠의 집권을 크게 환영했다.
당시 남베트남은 남한과 더불어 아시아의 적화를 막는 반공기지의 최전선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다.
미국과 호주를 방문해 서방권 인사들을 만나면서 그의 국제적 입지는 점점 굳혀져갔다.
좌파를 극혐한 그는 지주층과 기독교세력, 해외 유학파 출신 지식인들, 군부, 경찰 세력을 기반으로하여 강력한 반공정치를 폈다.
학문, 예술 작품에 대한 검열을 강화하여 반체제, 좌파적이거나 지나친 자유를 외치는 서적, 학문, 작품에 대한 검열과 탄압, 단속 정책을 펴 나갔다.
그의 치세 기간동안 10만에 달하는 좌파들이 처형당했다
그는 자신의 가족들과 측근들을 고위직에 대거 등용한 일종의 측근, 가신 세력을 형성하여 남베트남을 지배했다.
독재체제의 특징인 족벌인사로 형제들을 고위직에 임명했다. 또한 스위스 은행에 널린 재산과 라오스를 통한 불법 밀수 등을 이용해 미국과 무역을 해 막대한 이익을 챙겼고, 가톨릭 교회에 대한 농장, 토지, 부동산 등을 지원하여 자신의 지지 세력을 강화하였다.
남베트남의 토지는 대부분이 소수의 기득권 관할이 되었고 남베트남의 양극화는 심해져만 갔다.
응오딘지엠은 80%의 베트남인들이 믿는 불교를 차별하였다
모든 편의를 천주교인들에 대해서만 보장했고 카톨릭 교회는 남베트남에서 가장 많은 땅과 권력과 부를 소유했다.
디엠은 공산당을 잡는다는 구실로 수많은 불자들을 투옥 및 처형하였고 디엠의 이 행동은 서구권 세계에서 보기에도 영 좋지 않았다
1963년 남베트남 정권과 불교간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석가탄신일이 폐지됐고 이에 시위하는 불자들에 대한 총격 사건이 발생해 수많은 불자들이 죽자
이에 베트남의 승려 틱 광툭이 소신 공양(분신 자살)을 했다.
이 장면은 전세계 TV 화면에 중계되어 세계인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이 사건을 계기로 베트남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반전 운동이 격렬히 들끓게 되었다.
이 사진을 찍은 촬영 기사는 퓰리처 상을 수상했고, 국제사회에 응오딘지엠 정권에 대한 여론은 심하게 악화되었다.
급기야 미국마저 디엠에게서 등을 돌리고 만다.
불안이 악화되는 가운데 그해 즈엉반민 장군은 쿠데타를 일으켜 사이공 장악, 대통령궁을 공격하기로 했다. 쿠데타는 매우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고위직 정부 요인들이 대거 체포되었으며
이미 민심을 잃을대로 잃은 디엠의 세력이 붕괴되는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수비군은 대통령궁을 완전히 장악한 쿠데타 세력에게 항복했고 디엠은 쿠데타 군에 의해 처형 당한다. 그의 나이 63세였다.
그가 죽은 후 베트남 지역은 더욱 큰 혼란에 직면한다.
승려의 소신 공양과 디엠의 공포 정치에 질릴 대로 질린 시민들은 전쟁보단 평화를 외치며 시위를 해댔는데
그들은 그것이 북베트남 간첩들이 퍼뜨린 위장평화공세라는걸 눈치 채지 못했다.
UN의 강력한 서포트에도 베트남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한때 서방의 무한 지원으로 아시아 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했던 남베트남.
1975년 남베트남은 월맹의 수중에 떨어지고 말았다.
아시아 최강의 월남이 대체 어쩌다 자신들보다 훨씬 딸리는 월맹군에게 패했을까
그렇게 된데에는 월맹에 대한 중국 소련 등 공산권 국가들의 막대한 지원도 있었겠지만
부패할 대로 부패한 그리고 간첩들의 분탕에 놀아난 남베트남. 즉 UN의 무한 지원이 밑 빠진 독에 물 붙기에 불과했던 상황이라고 보는게 젤 알맞을 듯 하다.
단합이 잘 되었던 북베트남 Vs 단합력 제로인 남베트남의 싸움이라고 봐도 무방할듯.
한때 서방의 무한 서포트를 받으며 승승장구했 절대권력의 지도자 응오딘지엠
누구보다 공산주의를 극혐했지만 결과적으론 나라 전체를 공산화 시키는데 기여를 하고만 응오딘지엠. 뚜렷한 신념은 가지고 있었지만 어설프고 무능한 「가장 위험한 부류」가 이 사람이 아닐까?